▲ 필자가 진주 교육대학을 졸업하던 1965년 식을 끝낸 후 아버지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

아버지 호는 소제(小濟)다. 하시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하자, 환대(煥大)라는 이름이 너무 버겁다며 안호상 박사님이 지어 주셨다. 어머니의 당숙부이신 안 박사님은 참의원 선거에 입후보하실 때 우리 집 만화당(萬和堂) 한약방을 선거 사무실로 사용하셨다. 여고생인 나는 ‘렌의 애가’를 탐독했는데, 엄마는 안 박사님이 나타나면 얼른 그 책을 숨겼고 나중에는 찢어 버렸다. 안 박사님 전 부인이 모윤숙 선생이라 어머니의 간섭은 합당한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애달파하자 아버님은 그 책을 다시 사주시며 타일렀다. 어무이 몰래 보려무나.

아버지는 27세 때 만주로 가서 개척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이상과 현실이 너무 동떨어짐을 뼈저리게 경험하셨을 뿐이다. 귀국해서는 고향 진주시 대곡면 봉평에 대곡중학교를 설립했고 국어 겸 한문 선생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하지만 6·25 때 폭격으로 교사(校舍)가 불타는 바람에 가르치는 일도 그만두고, 진주 중앙 로터리 옆 2층 건물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셨다.

아버지가 한약방을 차린 건 외동딸의 지병 때문이었다. 세 살 때 홍진을 앓아 그 후유증으로 코피를 연거푸 흘려 까무러치곤 했는데, 숨졌다 싶으면 깨어나고 살았다 싶으면 숨이 넘어가는 일의 되풀이라 외동딸 목숨만은 책임지리라는 야무진 결심을 하셨던 것이다.

만화당 한약방 건너에는 손한의원이 있었다. 해방 후 호열자가 전국을 강타할 때 거부(巨富)가 되었고, 서울에 이명래 고약이 있다면 진주엔 손고약이 있을 정도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꾸준히 성장해 온 인삼당 한약방도 있었는데, 아버지가 그런 명의들과 어깨를 당당히 겨룰 수 있었던 건 만주에서 한의를 익히기도 했지만 남다른 사부를 모시고 있어서였다. 지리산에서 도를 깨쳤다는 사부는 까까머리가 아닌 상투 튼 백수노인인데 본초강목과 동의보감을 섭렵하여 한의에 도통한 분이었다. 하루는 스님이 우리 집을 방문해 사부에게 큰절을 올렸다. 사부 상투가 꼿꼿해져 노인 허세가 대단하다 싶었는데, 그 스님이 성철 스님이었다. 스님이 나를 보고 연민에 젖자, 이를 눈치 챈 사부가 “딸은 어떻게 하노” 하고 물었다. 그러자 성철은 “불필(不必)”이라고 대답하더라는 걸 아버지가 들려주셨다.

만주 사업실패 뒤 진주에 중학교 설립
6·25때 校舍 붕괴… 가르치는 일 접어
봉숭아물 들어주시던 자상함 아직 생생

아버지는 흰옷을 즐겨 입고 피부도 해맑아 지기들에게 선비로 대접받고 있었다. 키도 크고 모습도 기품이 있었지만, 남에게 하나를 받으면 둘을 주어야 하고 누가 부탁하면 거절치 못해 그런 대접을 받은 것 같았다. 사상범 친구가 경찰서에 잡혀가 초주검당한 걸 석 달 동안 우리 집에서 간호하고 숙식을 제공했는데, 이듬해 친구가 숨지며 유언하기를 내 상여가 봉평 성환대 집 마당에 머무르게 하라, 하여 상여꾼들이 그리 하자 그 상여가 움직이지 아니해 혼쭐난 사건도 있었다 한다.

퇴기 염파(簾波)는 만화당 한약방 가까이서 찻집을 경영하고 있었다. 염파란 발 그림자의 아른아른한 무늬나 결을 뜻한다. 기명(妓名)을 지어주고 머리 얹어 준 연인이 독립군과 연줄 닿았다 하여 왜경에게 쫓기다 의암바위에서 숨지자 염파는 머리 풀고 남강에 배를 띄워 애간장 녹는 듯한 곡을 하여 간담이 서늘해진 왜경이 “논개가 환생했어” 하며 무서워 도망쳤다는 내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당 김은호 선생이 의기사(義妓祠)에 봉헌할 논개 초상화를 그릴 때 모델이 되기도 했다.

염파는 만화당 한약방 단골 손님이었다. 오래도록 가슴앓이에 시달린 염파가 속이 쓰리다고 호소하면 아버지는 손수 지은 환약을 거저 주곤 했다. 염파는 아버지를 오라버니라 불렀고, 작설차 식혜 약과를 우리 집으로 가져와 고마움을 전했다. 아버지가 벗들과 뱃놀이를 가면 염파는 술과 곁두리를 가져가 극진히 대접했고, 아버지가 53세에 돌아가시자, 머리 풀고 가야금 켜며 창(唱)으로 애도했다. “뭇 한량들이 나를 유혹했지만 소제 선생은 나를 누이로 깍듯이 대해 주었다”고 고백하곤 했다.

가문을 이을 후손을 중히 여긴 집안 어른들이 외동딸 하나에 못미더워 아버지께 새장가 가라고 독촉했다. 아버지는 끝내 거절하셨고, 마흔이 넘어 어머니가 외아들을 낳자, 이웃들은 아버지의 온화한 성품을 하늘이 알아준다고 했다. 부녀가 뱃놀이 가면, 아버지는 딸 손톱에 봉선화 꽃물 들여 주시고 아주까리 잎으로 싸맨 손톱을 ‘아주까리 골무’라 하셨다. 이튿날 나의 손톱에 발그스름한 꽃물이 피어오르면, “달이 떴네” 흐뭇해하시고는 삼국지나 위인 전기도 들려주시고, 당신이 지은 시도 풀이해 딸에게 시심도 키워주셨다.

아버지의 지극한 간호로 코피 흘리며 쓰러지는 나의 병은 완쾌됐다. “너를 살릴 수 있다면 내가 숨져도 좋으련만” 가끔 그러시던 말씀이 사무쳐 결혼 후 세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아버지가 그립고 보고파 자주 눈물 흘리곤 했다. ‘당신이 못다 산 생도 거둬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집념이 도도히 흐르는 남강 물처럼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일깨우고 있다. 그건 아름다운 글을 쓰는 거다.

성지혜는...

▲ 성지혜

1945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한 소설가 성지혜는 1994년 장편소설 ‘환상의 나비’를 출간한 바 있다.

그 이후 ‘월간 문학’에 단편소설 ‘꿈을 따는 따오기’로 다시 등단(1999)했고, 2000년에 작품집 ‘사랑을 기다리는 의자’를 냈다. 신앙 에세이 ‘사랑으로 여는 마음’을 준비 중이다.

진주 교육대학, 한세대 신학과를 졸업했으며,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화예술학과를 수료했다.